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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해 보이는 모습이 있습니다.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어느 시절의 구름이 그러하며 저 바다와 산의 모습이 그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이 그런 자취를 드러내며 남깁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고 그 필요를 다 공급해 주시지 않는가 (마 6:26~30) 라는 성경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음에 그 모두에 필요하고 적합한 것을 채우십니다.  

나아가 달란트의 비유 (마 25:14~30) 를 통해서는 생명체에게 주신 여러 신체 구성과 그 능력을 잘 사용해야 하는 것임에 관한 것임을 압니다.

새들이 움직이고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여 먹을 것을 얻게 하심이며 이는 하늘을 향해 가만히 무언가 공급해 주시겠거니 하고 입을 벌리고 있으면 된다는 것은 아님으로 여깁니다. 물론 그럴 시기가 있음에도 그 시절을 지나면 일반적인 경우에 배운 것을 알맞게 실천해 삶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성장의 의미일 것입니다.

 

경제부분이 삶의 일부가 아닌 적이 없음으로 같은 선상으로 가늠해 봅니다. 이전의 글 가운데 잠시 언급한 적이 있을 것이며 간략함에도 제법 중요한 근간이라 생각하며 한번 다루어 보는 가운데 근래의 경제 충격의 때를 넘어 향후에 적절한 투자를 위한 접근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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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한 사람들은 아는 2008년 전후의 금융위기 시절을 시작으로, 간략한 재무제표를 예를 들어 살펴봅니다. 연도와 자산, 부채, 자본, 부채율이 표시되었습니다. 0을 몇 개 가감하던지 여러분의 형편이라 생각해보면 이해에 적절할 것 같습니다.

어느 사람이 2008년에 자산 천백 만원, 부채 육백 만원, 자본 오백 만원으로 부채율 통상 120% 라는 수준의 재무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합시다. 이 수준이 좋고 나쁨을 넘어 부채는 있으되 과도하지 않음의 적절함에 관함입니다.

해당 분야를 잘 아시는 분들은 기초 수준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임에도 금번 기회에 새삼 살펴보면 어떠한가 싶습니다. 배우는 학생에겐 유용한 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기초가 중요한 것을 아는데 때로는 간과하기도 하는 것 같기에, 물론 모두가 기초에 충실하다면 거품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고 세상이 이만큼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전혀 없지는 않음을 알면서도, 잘 적용해 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08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채율 120%입니다  
자산과 부채 자본의 비율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삶의 형편도 같은가 싶습니다.   자본을 사용하여 무언가 나은 것을 이룸에 못지 않게 부채의 유지를 위해서 들여야 하는 노력의 증가도 그 못지 않을 것입니다.

은행의 예금 이자율은 상대적으로 낮으며 무언가 계속 산업을 이루기엔 기초가 부족하여 여러 부작용이 함께하게 되는 가운데, 부채를 사용하여 부채의 유지 비용을 맞추면서 무언가를 해나는 것이 같지 않을 것입니다. 부채가 백만 원 일 때와 천 만원, 일억 원 . . . .  의 때는 같은 120% 수준인데 과연 같은가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반적인 이자율이 낮아진 시기에는 이자 부담이 적어 돈의 가치를 넘어 위험성에 둔감해지는 부작용이 적지 않을 수 있어 보입니다.

물론 능력 있는 사람은 이를 잘 활용하여 한 단계 도약하는 삶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의 수준에 합당한 자유로운 범주 내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각자의 역량임은 분명합니다.   새가 이미 공급해주신 자신의 먹이를 알맞은 수고로 찾고 얻는 노력을 행해야 함과 같습니다.
알맞음을 찾음은 쉽지 않으며 그래서 수고와 노력이 누군가에게 묘미일 수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흥미를 느낀다면 관련 분야 등에 재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과도함에 있습니다. 성경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예의 모습은 결국 불균형의 과도한 심화에 대한 책망과 징계에 관한 것임을 가늠합니다.

과거에 비해 가난한 삶도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풍부한 유동성의 긍정 결과라고도 합니다. 주변을 넘어 저 먼 오지의 국가와 곳의 경우 그런 혜택으로 이전에 비해 나아졌다고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 자족하라고 하는 것은 합당한 것인가 싶습니다. 그들이 나아진 정도는 잘사는 곳의 삶이 더 잘 살아진 모습에 취해 스스로 위안을 얻게 하기 위함은 아닌가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적절한 금리의 수준은 어느 정도 인가요.      
통상 인플레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도 하는데 너무 낮은 금리는 대출자에겐 당시엔 좋을 수 있어도 예금자에겐 불만이 되며, 때로는 대출자의 방만함이 더하여 그 후유증의 여파는 적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 아니 근자에의 경험으로 어느 정도 체험을 했을 수 있습니다.

금번의 글을 통해서 숫자가 주는 혼동에 대해 일깨움이 되었으면 하며, 나아가 세상에는 그와 같은 혼란 착각에 들게 하는 것들이 적지 않음을 일깨웁니다.

120 = 120인데 같지 않은 120 으로부터 배울 수 있음은 무엇인가요. 나아가 몇 십의 수준도 규모가 커짐에 다르게 다가옴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무렵 누군가 50으로 줄여놓았는데 좋아 보여 잘 했다고만 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 것인가 싶습니다.

 

규모가 좀 더 확장된 시절 50% 수준일 때로 한번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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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율 50%의 예로 외견상으로는 앞의 예에 비해서 좋아 보이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돼 보입니다.
살펴보는 부분은 자본이 증가한 것과 같이 부채도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비평을 더하면, 자본이 고무줄 늘어나듯 하는 무언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자본을 통해 얻는 무엇이 빚을 유지하는 것보다 곤란하다면 어떻게 되겠는지, 어느 시절에 이도 저도 힘들어 결국 거품을 바라며 만들어 내는 근간이 거기에 있지는 않는지 싶기도 합니다.

부채가 줄어들어 보이기 위해 자본을 많아지게 하는 거품이 필요하니 결국 자산을 이루는 무언가의 가격이 올라야 되는 것이며 어느 시절 너무 저 멀리간 주식과 부동산 등의 가격은 산 정상에 위치하기에, 거기가 좋다는 소문으로 그곳에 기를 쓰고 올라가 보니 아시다시피 높은 곳은 면적이 좁더라는 것이죠. 과연 오래 거주할 만한 곳인가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간신이 마련한 돈으로 올라간 그 곳엔 해가 저물고 추워지니 곧 내려가야 하는 때에 이릅니다.

집 구입의 꿈을 접고 애라 쓰면서 살자 하는 모습과 갚지 못할 빚을 얻어 자산을 일단 구입해 놓고 보자는 탐심과 파산을 악용하려는 모습 등이 있음이 그렇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지 하며 그와 좀 거리를 두고 살려는 모습도 존재합니다.

 

과연 살 집이 모자라 가격이 오르는 것인가요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 외에도 그냥 가격이 상승하면 좋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편승해 시절마다 가격이 상승하게 놔두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앞서의 부채를 줄여 보이고 자본을 늘려 보이게 해야 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빚을 내어 잘 사용하기 보다는 빚을 내어 자랑과 탐욕을 위해서 사용한 결과는 아닌가 싶음이 있습니다. 그 후유증은 알게 모르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넘기는 것은 아닌지 공동 책임이라는 명분하에.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부익부 빈익빈은 더 가중되니, 애초엔 나쁘지 않은 의도로 결국 산을 깍아 낮은 고도를 만들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언덕을 제공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산을 깍으니 여러 중장비 등 여러 무엇이 필요하게 되고 그것 또한 나쁘지 않기에 단기를 넘어 중장기적인 파이를 더 키워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여러 이해타산과 욕심으로 정해진 선보다 더 많이 파고 깍기도 하여 평지에 다다르기도 하고 결국 자산 가격의 바닥을 이루었다고 통상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뒤늦게 이치를 배우거나 깨친 사람들은 다음 번의 거품은 언제나 더 커지길 기대하며 후손에게 거품의 미학을 전수하며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음으로 다음 번의 거품은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구를 넘어 우주를 바라보는 이유가 결국 같은 이유라고 보일 때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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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그럼 좀 실제적인 도움의 투자접근은 무엇인가요.
많은 정보가 가능한 세대에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무엇이 있어도 그 것이 속한 사회가 좋지 않으면 그것의 가치는 발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궁극적으론 세상의 모든 모습이 나그네의 와중으로 여긴다면 너무 집착하거나 미혹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만 인생이 간혹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음이며, 인간미에 그런 모습이 있음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좀 더 오랜 수명을 위한 여러 접근과 결과들, 디지털 영생 등 수 많은 그리고 앞으로 더할 그러한 표면적인 허울에 산업의 파이가 키워짐은 세상의 논리로는 어느 정도 타당하면서도 동시에 참된 진리와는 거리가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지 싶기도 합니다. 미혹과 진리의 구별이 점점 요구되는 시절일 것이며, 세상이 그러하듯 기독교 공동체도 이를 분별함에 나름의 역량을 갖추려 할 것 같습니다. 여하튼 실수는 되도록 최소화 되길 바래봅니다.  

 

좋은 나무여도 숲이 불타고 있다면 그것이 온전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몸의 여러 장기가 튼튼하고 좋은데 일부 장기가 좋지 않다면 신체가 과연 좋다고 할 수 있는가 싶음도 같은 선상입니다. 괜찮아요 신기술로 바꾸면 되요 하는 세상의 도래함에 관해서도 유의가 없지 않습니다

좋은 투자처는 어느 정도 공개되는 세상이니, 그런 투자 이전에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면 주변의 환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은 투자 접근법입니다. 여기에 덧붙이면 좋은 것을 싸거나 적절한 가격에 사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비이성적으로 고가에 구입하면 그것이 바로 저 멀리 화마가 오는데 좋은 나무를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보입니다.

여느 좋은 시기를 놓쳤다면 저축을 하면서 일하면서 공부하면서 다음 번의 좋은 투자 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과연 다음 번이 오겠어 하는 모습으로 영끌이니 막차잖아 하는 모습 등이 등장한다고 보이는데 좀 더 좋은 이해를 지니길 바래 봅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땅을 구입하는 것은 좋은 접근일 것입니다. 나무가 불타든 무슨 일이 있든 땅을 소유하면 결국 회복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근원자산입니다. 과연 땅과 같은 것은 무엇 인가요. 그것은 좋은 건강과 지식 등일 것입니다. 이것이 있다면 결국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기간에 한해서이며, 기독교인으로서는 좋은 신앙이 근간일 것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음이 이상하듯, 경제 환경도 등락이 반복하는 것은 거의 필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이미 세간에 알려진 사실을 지켜나간다면 적절한 부를 이룸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본인은 전문가는 아니며 다만 기본의 범주 정도 알고 있음과 그 기본을 지키면 어느 정도 수준은 이룰 수 있음에 근간합니다.

 

세상 경제의 꽃인 기업 문화는 주로 일찍이 사람들의 필요한 무언가를 좀 더 적기에 공급하려는 접근에 성공한 서구의 자본주의에 근간하여 자유민주적 풍토를 통해 그간의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보입니다.  

각자의 경험을 통해 알듯이 제한하지 않고 수 많은 것들을 먹을 수 있게 한다면 그 결국에는 과체중과 여러 질병에 고생을 많이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부작용 같습니다. 물론 그에 따른 여러 산업의 확장과 발전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인간의 고유한 능력과 자유 의지를 존중하고 스스로 원하고 바라는 것을 최선을 다해 집중하며 이룸을 미덕으로 여겨주는 것입니다.물론 반칙에의 조건 없는 관용은 아닙니다. 부작용인 나눔의 부족과 약자에의 배려 부족 등을 소홀이 하는 부분이 없지 않음으로 비평을 받긴 합니다만 다른 환경에 비하면 그나마 유효한 부분이 많기에 세상의 주류가 이런 모습이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하루 필요 칼로리를 근간으로 최소한의 분량을 채워 포장한 정도의 음식만을 먹음은 어떠한가요   이는 근근이 살아도 영양실조와 같은 모습으로 살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적게 먹는 소식이 좋다고 무작정 강요하는 소식에는 무리가 없지 않습니다.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는 근원 자산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분위기 가운데 인간의 내재한 고유한 창조주의 부여하신 달란트에 대한 믿음을 통해 무언가를 발전 성취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무지와 부정적 측면만을 집중하며 부작용의 과대 포장의 결과로 불균형에 이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와는 좀 거리가 먼 곳의 모습 같습니다. 창조주의 존재하심과 피조물인 인생에의 본성에 좀 무관심하다는 부작용이 있다고 보입니다.

인생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것, 저것, 이것과 저것의 혼합 등 나름의 최선을 통해 계속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본인은 중도 우파인 자유민주주의에 근간한 자본주의를 지향합니다. 적절하게 잘 벌고 알맞게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오른손과 왼손의 합치가 최적의 삶이 됨과 때로 부득이한 균형 상실의 결과는 당사자의 곤란입니다. 무언가를 잃은 다음 그때를 아쉬워하는 것은 그렇게 좋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오른손과 왼손은 서로 다투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툼이 있다면 한 몸이 아니라는 얘기죠. 그런데 항상 맞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같은 가족인데 다투지 않나요 때론 다툽니다. 다투어도 가족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심하게 다툰다면 다른 무언가의 개입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적절한 도움의 필요함을 알면 좋을 것 같습니다.   


때론 인생과 인류는 그런 불우한 경험을 통과함으로서만이 그 기억에 근간하여 잘못의 반복을 행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어리석은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음을 인류의 역사는 물론 근래와 주변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책 등의 간접 경험이 아무리 좋아도 체험의 부재는 좀 한계가 없지 않을 것 같으며 시행착오는 할 수 있으면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여러 타락도 같은 선상입니다. 여느 옳지 않음에도 무심함은 아부와 아첨의 아류에 가깝습니다. 서로간에 그런 삶이 될 수 밖에 없음에는 일부 불쌍히 여김에도, 이를 옳다고 하는 사회의 앞날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우린 압니다. 때론 재능 있고 뛰어난 사람들이 여느 좋지 않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도 있을 수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오래 전 얘기를 꺼내 미안합니다만, 로마 등의 여러 제국이 과거 당시에 얼마나 좋아 보였습니까 그 재능을 좋지 않은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던성애 등을 과도하게 지지하는 사회의 미래에 대해서는 의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세대라고 과연 다를 수 있는가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 여느 폭정 제국에 비하면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의 모습이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반문이 가능하여도, 같지는 않아도 유사함에 근거한 여파의 후유증은 없지 않을 것임을 가늠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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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주어진 최고의 나침반인 성경의 말씀에도 회개하라고 하심을 처음 행하신 곳은 다름아닌 자국민, 자녀의 변질과 부패를 향해 하신 것입니다. 잘못은 바로잡고 고쳐야 하는 것이기에 그래야 모두가 사는 것입니다.

뿌리깊은 죄 성입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는 인류의 고견을 넘어, 깊은 죄 성은 인생의 갈 길을 그렇게 미혹하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인류에겐 분쟁의 고난이라는 역사가 함께하게 된 것 같습니다.

본인도 용서받은 죄인 곧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으로 이렇게 삶의 모습에 대해 잠시 얘기를 건네봅니다.

얘기가 좀 돌아 흘렀습니다.

 

겉이라는 표면을 넘어 이면인 속도 봐야 하는 경우에 관한 것 같습니다.
아이적엔 표면에 집중하는데 이면도 있음을 알게 되면서 인생은 성장과 성숙에 눈을 뜬다고 보입니다.

겉인 세상이라는 무대, 감각되어지는 피조된 세상이 곧 표면이며, 그 세상을 살아가는 피조물 간의 관계성, 소통 등에 관함을 이면으로 여기면 그렇게 틀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게 된다고 하심과 같이, 처음에는 희미하였으나 때가 되면 밝히 알게 된다고 하심과 같이 표면을 이루어 가는 이면의 존재에도 관심을 가지며 이 시절의 한때를 보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때에 도움을 주었으며 그런데 도리어 방탕하게 그 돈을 사용함에 분통으로 여기며 그런 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에는 무어라 할말이 따로 없습니다.

 

기다림 . . 상처의 치유 . . 용서 . . 회복 . .

 

사실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실제는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받은 것임을 부일 할 수 없을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면 좀 더 다스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누군가에 그럼에도 용서와 인내로 기다리고 알맞은 방법을 지속함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몇 시간, 몇 일, 몇 달, 몇 년, 몇 십 년, 몇 세대 등 지속하고 있음을 봐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인생이 가늠하기 힘든 선상의 척도에 있음을 가늠해 봅니다.
물론 인생이기에 스스로에 알맞은 모습을 통해 적절한 접근이 필요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비슷함이 적지 않습니다.  잘못 된 비슷함은 짝퉁이라는 속어로 취급되고 잘된 비슷함은 나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당시에도 누군가에겐 비난과 하대 당하심이 없지 않음을 발견합니다만 결국 진정함은 드러나게 됩니다.

이 세대에 기독교인이라는 명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가늠한다면 때론 두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진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짜였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가짜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등 어느 평가에 이를 것 같은지요. 스스로는 어디를 향하고 있음으로 여기는지 자문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내 역할은 선한 역할이야, 짝퉁도 필요한 것 아니야, 악역을 맡았기에 어쩔 수 없잖아 등 그러하기도 한데 과연 진정 그러한가요 

한 때 집을 나갔어도 험악한 모습으로도 결국 돌아오는 둘째 아들과 같이 되어야 하며, 마지막이라도 결국 주께 회개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미혹이 함께하는 세상에 부여 받은 생명과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여 합당한 열심의 노력으로 성령과 동행하며 결국 예비하신 천국에 드는 성도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며, 전쟁과 분쟁 등으로 고통 받는 피해자들의 고난의 모습에 위로를 전합니다. 이를 통해 주시는 가르침과 타락을 향해가는 세대에 울리는 경종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Jun 2022